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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대 악성 난계 박연 선생 배향지 오봉사와 충렬문 ①오봉사

이금노 前곡성군복지실장

2024년 07월 17일(수) 10:08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리우는 난계 박연 선생을 배향하는 사우 오봉사는 단종 복위가 실패하자 세조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온 난계 선생의 증손자인 박경흥이 1450년대 충청도 영동땅으로부터 입면 삼오리 궁동마을로 입주해 살면서 박씨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1959년 호남 후손들의 성금으로 박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 박연(朴堧) 〔1378년(고려우왕4년) ~ 1458년(세조4년)〕선생은 조선초의 음악가로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사람이다.

선생은 태종 五년(서기 140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태종11년(서기 1411년) 문과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집현전 교리를 시발로 벼슬길에 올라 태종, 세종, 문종, 단종 四조에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 시강원 문학을 거쳐 공조참의, 예조판서, 이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 및 보문관 제학, 예문관 대제학과 관습도감 제조를 역임했다.

세조 즉위 (서기 1456년) 후 선생의 三子 집현전 한림학사 계우의 단종 복위운동으로 인한 참형(斬刑)과 아울러 자손 모두가 이에 연좌(連坐)되어 문중을 멸(滅)할 화를 당할때 선생만은 원로 공신이라 하여 연좌를 면하고 단신으로 백의낙향(白衣落鄕)후 후세에 전할 가훈(家訓) 17칙을 남기고 세조 4년(서기 1458) 3월 26일 영동 고당리 자택에서 八十一세로 생(生)을 마치셨다.

박연 선생의 업적은 각종 행사의 예악(禮樂)제도 및 윤관(아악기)에 대한 개선의 상소는 문치(文治)에 뛰어난 세종대왕이 이를 받아들여 궁중음악(雅樂)의 제정과 음률(律呂)의 창안제조를 명하니 문인으로서 악예(樂)의 재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얻어 대업을 완수 하였다.

아악기의 기본인 음률조정관(黃鐘律管)을 해주산 기장(巨장)을 넣어 十二 율음을 고르게 하였고 남양산 맑은소리 나는 돌(石)로 편경(編)을 만들었으며, 흙구이 와경(와경)을 석경(石경)으로 새로이 만들었다.

​이와 같이 모든 악기를 개조하고 새로이 만들어 고려 때 당나라풍의 아악을 폐지하고 우리 정악(정樂) 시행을 주청하여 4대 제향 때 당상(堂上)은 양(陽)이므로 음률(陰)을, 당하(堂下)는 음(陰)이므로 양률(律)을 연주하는 음양조화를 이룬 제례악과 어전조회(御前朝회) 및 궁중연회 때 각기 다른 악기와 아악을 연주하고 천신(天神), 지신(地神) 단제와 선조(先祖), 선비(先)의 제향에도 각기 다른 대사악(大司樂)을 연주하는 등 무수한 아악제도를 개선하여 세종대왕이 경탄한 사실은 세종실록과 난계유고에서 확인된다.

​이때부터 우리 아악은 자주적 우월성을 가졌으니 후세는 선생을 조선의 악성(樂聖)으로 추앙함에 이르고 우리 아악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 출처: 악성 문헌공난계 박연 선생을 배향한 오봉사 안내 간판.
※오봉사 위치: 곡성군 입면 삼오궁동길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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