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앞두고 고향의 모교인 중앙교로 발령받아 와서 날마다 빤히 보이는 서산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곡성의 명산인 형제봉과 동악산을 생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 주말을 이용해 혼자서 형제봉과 동악산을 연달아 올랐었다.

형제봉을 오를 때는 중간에 있는 길상암 터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동악산 등산중에는 신덕왕후가 행차했다는 신덕사란 절터에서 역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길상암이나 신덕사처럼 예전에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은 것을 폐사지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폐사지로는 경주에 있는 황룡사 터 정도가 될 것이다.

사족을 단다면, ‘폐사지를 물리적으로 정의하자면 만물의 생성과 지속원리인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 작용’에서 물질은 사라지고 에너지만 남아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불완전하게나마 물질(석탑이나 불상, 석등 같은 유물)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물질이 대부분 사라진 빈곳을 채우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건축이 망한 곳에서 건축의 완성을 볼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이다. 그 말은 폐사지의 건축은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문한 사람이 스스로 빈 곳을 채우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인식능력과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주추만 남은 자리에 기둥을 복원하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 완성한다. 건축을 감상하는 대신 창조적인 수용으로 스스로 건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좋은 것은 그 곳에 가면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고 간혹 오더라도 금세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소리가 완전히 소거된 채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고 궁극적으로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고 어느 학자가 말했다.

어쨌든 나같이 등산에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 형제봉등산은 쉽지 않았고 동악산등산은 더욱 힘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동악산에 대해 할 말을 더해 본다.
도림사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원효대사가 도림사를 지을 때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진동하고 산이 춤을 췄다고 하여 산 이름을 동악산(動樂山)이라 하고, 도인들이 절에 숲처럼 모여들어 절 이름을 도림사(道林寺)라고 지었다’라고 씌어있다.

여기서 원효대사가 보통 인물인가?
중국 유학길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맛있게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條)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신라시대 최고의 고승이 아니던가! 따라서 그가 지은 절이라면 그건 이미 보통 절이 아니며 아울러 절을 지을 때 하늘의 풍악소리에 맞춰 산이 춤을 췄다면 그 산 또한 보통 산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실 곡성 읍내에서 서쪽하늘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형제봉이다. 각각 떨어져있는 두개의 산봉우리가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그리고 높게도 낮게도 아니게, 안성맞춤으로 쌍봉으로 솟아올라 곡성읍내를 넉넉하게 안고 있는 모습은 가히 빼어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어디에도 이보다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이는 쌍봉은 없으리라고 감히 단언한다.

따라서 곡성 읍을 대표하는 산이 형제봉이라고 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선조들은 그 멋진 모습을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두 봉우리가 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에다 군청소재지의 터를 잡고, 형과 아우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며 형제봉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그 뛰어난 미적 감각과 깊은 안목에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곡성군청자리에 가서 보면 형제봉의 쌍봉이 가장 폼 나게 솟아있음을 금방이라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 산의 대표자리를 그 멋진 형제봉이 아닌, 그저 평범하게 보이기만 한 동악산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동악산이 곡성읍에서 제일 높은 산(735m)이라는 것과 더불어 동악산이란 이름이 품고 있는 그 신비한 전설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겉치레보다는 알맹이를 더 중시해온 사회풍토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신비롭고도 귀한이름 동악산(動樂山)을 오늘날 우리는 그 이름과 유래를 얼마나 알고 제대로 쓰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나 강의 이름을 딴 조직이나 단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동악산의 경우 곡성읍을 대표하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자를 잘못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動岳친목회, 東樂위친계등 한 글자를 잘못 쓴 경우와 심지어는 東岳상여계처럼 ’동악‘이란 이름 전부가 틀린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무식해서가아니라 동악산의 유래를 깊이 살피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곡성읍민의 상당수가 動樂山이 아닌 動岳山이나 東岳山또는 東樂山으로 잘못알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노래와 춤의 축제 속에서 탄생한 동악산을 곡성의 상징이라고 자랑을 하면서 그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은 동악산이라 이름지은 우리 선조에 대한 예가 아닐뿐더러 곡성읍민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 반복하지만 곡성읍의 상징인 동악산은 원효대사가 도림사를 지을 때 하늘에서 풍악이 울리고 산이 춤을 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움직일동(動), 풍류악(樂), 뫼산(山)자를 써서 동악산(動樂山)이라고 해야 맞다.

동악산! 제대로 알고 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안창순 곡성시인의마을 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