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골 역사기행 陽亭 김학근 선생의 ‘의기․효행의 고장 곡성’ ②편<完> 곡성군 전지역 곳곳에 활발한 의병활동 흔적 곡성일보 admin@gsilbo.com |
2018년 05월 31일(목) 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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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은 호남의 명산 통명산과 동악산, 설산 등 빼어난 명산들이 있어 생명수인 물이 맑고, 공기가 좋고, 풍치가 아름다운 살기 좋은 곳이다.
비록 인구나 지역이 크지는 않으나 예로부터 의기(義氣)의 고장이요 효행(孝行)의 고장으로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임란 때 최초 의병장 월파(月坡) 류팽노(柳彭老)
월파 류팽노(1554∼1592)는 옥과면 합강리에서 판관 경안(景顔)아들로 본관은 문화 류(柳)씨이며 자는 군수(君壽)이다. 유아 때부터 총명하여 7살 때부터 이미 시를 짓고 16세때 진사시에 합격(1579)하고, 이어 25세 때 선조 식년시에 문과에 급제(선조 21년,1588)하여 홍문관 부정자, 박사 성균관 학유(學諭)를 지내신 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서는 맨 처음으로 의병을 전북 순창군 대동산 밑에서 청년들을 모아 1952년 4월29일에 의병을 일으켜 같은해 5월 29일에 호남의 의병의 총수인 고경명(高敬命)의병장 휘하에서 좌부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울 때 왜적에 비해 군사 면이나 화력 면에 부족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고경명 장군이 류팽노에게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라”고 명령함에도 “어찌 장군의 위태로움을 두고 제가 감히 이 자리를 떠나겠습니까?” 고경명 장군의 명령을 받고 진지를 벗어나려고 마부가 말을 이끌자 유팽노 의병장이 말 끈을 잡은 마부의 왼손을 칼로 베고, 그 자리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니 애마가 주인의 머리를 물고 고향 합강리 집에 장군의 두상을 마당에 내려 놓고 울면서 일주일 이상 말(馬)이 여물을 먹지 않고 죽어, 동네 사람들이 그 말의 갸륵함을 높이 평가하여 마을 앞 냇가에 묻어주니 후일에 그 말무덤을 의마총(義馬塚)이라 부르고 현재는 농지정리 때 옮겨 현존하고 있다.
부인 역시 원주 김씨로 남편 따라 자결하니 정렬각(旌烈閣)안에 삼강문(三綱門)이 전남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청계동과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撲)의병장
양대박(1544∼1592)은 본디 남원부 이언방(지금 주생면) 동대(東臺)에서 호남의 갑부 사대부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당대 이름난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청음 김상헌과 송강 정철, 동계 정온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나 출생신분이 서얼이어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자 이곳 경치가 아름다운 청계동 골짜기 폭포수 옆에 보허정(步墟亭)을 짓고 이상촌을 건설하고 있을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가 데리고 있는 노비와 아들 경우(敬遇)와 식졸 그리고 인근 곡성 남원 순창 청년들을 모아 의병을 모집하여 청계동에서 훈련을 하여 임실 운암 밤실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대승을 거두고, 고경명 의병장과 휘하 우부장으로 류팽노와 함께 싸우다가 과로로 순직하였다. 그가 1580년에 작성한 청계동도(靑溪洞圖)와 진중(陣中)일기가 전해오고 있다
♦병자호란 때 김감(金鑑)외 칠의사(七義士)
인조 14년 1636년 북쪽 오랭깨 몽고족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자 이곳 선비 김감(金 鑑)이 주축이 되어 오찬, 청호 유익청, 송정 김홍서, 북명 정운붕, 죽헌 허진, 모고헌 허정랑, 진사 오상지 등 칠의사들이 석곡 반구정을 중심으로 의병을 거병하고 왕을 수호하고 몽고병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과 군량을 싣고 청주까지 진군하다가 인조 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귀향하였다고 한다.
♦한일합병 때 소송(小松)정재건(鄭在健)자결
소송 정재건(1843-1910)선생 곡성 입면 약천리에서 정송강의 8대손으로 태어나 1888(戊子)년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 성균관 정적(典籍)의 벼슬을 지내다가 한일 합병이 강제로 되어 국권이 상실되자 비분강개하여 신하 된 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살아서 무엇하리오 탄식하며 자기 집 사랑채에서 유서를 남기고 손목 동맥을 끊어 자결한 열사이다.
☯유서(遺書)
亡國之臣은(망국지신) 不可以苟生(불가이구생)
吾誓不在於(오세부재어) 明治之世(명치지세)하고
구월사일(九月四日) 伏劍而死(복건이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신하가 구차하게 일본(명치시대) 치하에 살고 싶지 아니하여 구월 사일 칼로 자결하노라
☞교지(敎旨)와 小松遺稿(소송유고)가 있으며 추모비는 옥과면 설산에 있다.
♦구한말 곡성의 의병활동
곡성지역 의병활동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 다른 어느 지역 보다 활발하였다. 국가 보훈청 지정 의병 공훈자가 1차 2명이고, 추가 13명 이른다. 그 대표적인 몇 분을 소개 하고자 한다.
▲금천(錦川 ) 노임수(盧林壽, 1977ㅡ1911)
곡성 오곡면 덕산리에서 출생하여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원중, 조규하 동지들과 석곡면과 순천 삼산 전투에서 일본과 교전하고 1907년에는 감동신 의병장과 함께 지리산 덕유산 내장산 일대에서 활약하며, 고광순 의병과 힘을 합하여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부터는 독자 활동하면서 같은해 4월 16일 신정우진 의병 20명과 합하여 1908년 11월 8일 죽곡면 동계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직했다.
★건국훈장 국민장 수상
▲남강(南崗) 신정백(申正栢, 1877ㅡ1912)
죽곡면 남양리 출생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함. 죽곡면 남양리와 태평리에 공적비가 있다.
★국민훈장 독립장 수상
▲윤정구(尹正九, 1882ㅡ1946)
곡성읍 출신으로 의병부장(副長)으로 순창 남원 곡성 구례 등 섬진강 유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을 썼다. 묘지 도림사입구.
★ 국민훈장 애국장 수상
▲성암 조우식(趙遇植, 1869ㅡ1937)
오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선생과 의병 활동을 곡성 정읍 남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면암선생이 일본 대마도에 붙잡혀 갈 때 같이 수행하고 면암선생을 보좌 하다가 면암이 순직하니 같이 시신을 모시고 귀국하였으며 고향 마을에 오강사(梧岡祠)를 조영선(趙泳善, (1879ㅡ1932)씨와 함께 지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신위를 모시니 일본경찰서장이 강제훼철하니 이에 항의 뜻으로 사당 앞의 은행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곡성군 3.1운동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과 강제 합병이 되어 실의와 울분이 팽배할 때 고종황제의 음독설에 자극되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국민운동으로 확대될 무렵 우리고장에도 당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곡성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재직하고 계신 백당(白堂) 신태윤(申泰允,1884-1961)선생이 주도로 학생 정래성, 김중호, 양성만, 박수창, 김경석, 김기섭, 김택수, 정용태, 임락기, 김경택, 정연시 등이 앞장서고 군민과 청년들이 다수가 참여하여 1919년 3월 24일에 곡성읍 시가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그 후에도 옥과시장과 섬진강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로 인하여 학생 정래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형을, 신태윤 선생은 예비 검속 1년, 대구복심원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자격 정지 10년, 가산 몰수와 출향 조치까지 당했다. 백당 선생은 옥중에서 정사(正史)를 집필하였으나 판매 중지를 당하였고, 이어서 도해삼일신고, 고려사절요, 대한사략운기 등을 집필하고 해방 후 곡성건준위원장과 광주사범학교 교사, 조선대학교 역사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지난 2011년 곡성읍 학정리 단군성전 경내에 3.1공원이 조성됐다.
★국민훈장 애국장 수상.
♦유신반대 民族詩人 조태일(趙泰一)
조태일 시인은 우리고장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에서 대처승 조봉호씨와 신경임 여사 사이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광주 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저항 시인이다. 경희대 2학년 재학 당시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詩)<아침선박>이 당선 문단에 등단, 육군 중위로 제대 후 진정순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 하고, 월간 시전문지 <詩人>을 창간 운영하다가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했다. 제1시집은 <아침선박>1965년 간행 하였으며, 제2시집은 <식칼론>1970년 간행하여 유신반대 저항시인의 대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태일의 문학의 생명은 강건함에 있다. 야망과 위선을 직설화법으로 질타하는 그 통렬함에 있다. 총칼에 짓밟힌 민주, 군화 발에 유린된 인권의 현주소를 고발한다. 군사정권의 폭력을 좌시 하지 않겠다는 우렁찬 목소리다.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일어선다. 좌절의 상처가 깊을수록 그의 pen은 더욱 날카로웠다. 탄압은 식칼을 더욱 날카롭게 버리고 결국 유신의 심장을 겨눴다<48편의 연작시>
제3시집 <國土>는 긴급조치 9호로 판매 금지 당함
1978년 일본 이화서방(梨花書房)에서 <國土>일역 출간
1977년 양성우 시인의 시집<겨울공화국>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로 高銀 詩人과 함께 투옥
1982년 항일민족시선집<아아 내나라> 시인사에서 출간
1983 제4시집<가거도>. 제5시집<자유와 시인더러>1987년. 제6시집<산속에서 꽃 속에서)1991년(청운 문학상 수상). 제7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제10회 만해문학상 수상)
산문집 <詩人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 1996년간. 이론서<시 창작을 위한 詩論>1994년간, <알기 쉬운 시창작 강의>1998년간, 김 현 승 詩 정신 연구. 제8 詩集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년
1994년 광주대학교 예술대 초대학장으로 취임
1999년 간암으로 별세
▲1999년 보관문화훈장 추서
조태일 기념관 및 시집 박물관(곡성군에서 운영․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799 山18ㅡ24 ).
규모: 부지면적: 5.859 평방미터(1.772평), 건축면적: 419.49 평방미터.
비록 인구나 지역이 크지는 않으나 예로부터 의기(義氣)의 고장이요 효행(孝行)의 고장으로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임란 때 최초 의병장 월파(月坡) 류팽노(柳彭老)
월파 류팽노(1554∼1592)는 옥과면 합강리에서 판관 경안(景顔)아들로 본관은 문화 류(柳)씨이며 자는 군수(君壽)이다. 유아 때부터 총명하여 7살 때부터 이미 시를 짓고 16세때 진사시에 합격(1579)하고, 이어 25세 때 선조 식년시에 문과에 급제(선조 21년,1588)하여 홍문관 부정자, 박사 성균관 학유(學諭)를 지내신 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서는 맨 처음으로 의병을 전북 순창군 대동산 밑에서 청년들을 모아 1952년 4월29일에 의병을 일으켜 같은해 5월 29일에 호남의 의병의 총수인 고경명(高敬命)의병장 휘하에서 좌부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울 때 왜적에 비해 군사 면이나 화력 면에 부족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고경명 장군이 류팽노에게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라”고 명령함에도 “어찌 장군의 위태로움을 두고 제가 감히 이 자리를 떠나겠습니까?” 고경명 장군의 명령을 받고 진지를 벗어나려고 마부가 말을 이끌자 유팽노 의병장이 말 끈을 잡은 마부의 왼손을 칼로 베고, 그 자리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니 애마가 주인의 머리를 물고 고향 합강리 집에 장군의 두상을 마당에 내려 놓고 울면서 일주일 이상 말(馬)이 여물을 먹지 않고 죽어, 동네 사람들이 그 말의 갸륵함을 높이 평가하여 마을 앞 냇가에 묻어주니 후일에 그 말무덤을 의마총(義馬塚)이라 부르고 현재는 농지정리 때 옮겨 현존하고 있다.
부인 역시 원주 김씨로 남편 따라 자결하니 정렬각(旌烈閣)안에 삼강문(三綱門)이 전남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청계동과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撲)의병장
양대박(1544∼1592)은 본디 남원부 이언방(지금 주생면) 동대(東臺)에서 호남의 갑부 사대부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당대 이름난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청음 김상헌과 송강 정철, 동계 정온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나 출생신분이 서얼이어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자 이곳 경치가 아름다운 청계동 골짜기 폭포수 옆에 보허정(步墟亭)을 짓고 이상촌을 건설하고 있을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기가 데리고 있는 노비와 아들 경우(敬遇)와 식졸 그리고 인근 곡성 남원 순창 청년들을 모아 의병을 모집하여 청계동에서 훈련을 하여 임실 운암 밤실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대승을 거두고, 고경명 의병장과 휘하 우부장으로 류팽노와 함께 싸우다가 과로로 순직하였다. 그가 1580년에 작성한 청계동도(靑溪洞圖)와 진중(陣中)일기가 전해오고 있다
♦병자호란 때 김감(金鑑)외 칠의사(七義士)
인조 14년 1636년 북쪽 오랭깨 몽고족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자 이곳 선비 김감(金 鑑)이 주축이 되어 오찬, 청호 유익청, 송정 김홍서, 북명 정운붕, 죽헌 허진, 모고헌 허정랑, 진사 오상지 등 칠의사들이 석곡 반구정을 중심으로 의병을 거병하고 왕을 수호하고 몽고병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과 군량을 싣고 청주까지 진군하다가 인조 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귀향하였다고 한다.
♦한일합병 때 소송(小松)정재건(鄭在健)자결
소송 정재건(1843-1910)선생 곡성 입면 약천리에서 정송강의 8대손으로 태어나 1888(戊子)년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 성균관 정적(典籍)의 벼슬을 지내다가 한일 합병이 강제로 되어 국권이 상실되자 비분강개하여 신하 된 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살아서 무엇하리오 탄식하며 자기 집 사랑채에서 유서를 남기고 손목 동맥을 끊어 자결한 열사이다.
☯유서(遺書)
亡國之臣은(망국지신) 不可以苟生(불가이구생)
吾誓不在於(오세부재어) 明治之世(명치지세)하고
구월사일(九月四日) 伏劍而死(복건이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신하가 구차하게 일본(명치시대) 치하에 살고 싶지 아니하여 구월 사일 칼로 자결하노라
☞교지(敎旨)와 小松遺稿(소송유고)가 있으며 추모비는 옥과면 설산에 있다.
♦구한말 곡성의 의병활동
곡성지역 의병활동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 다른 어느 지역 보다 활발하였다. 국가 보훈청 지정 의병 공훈자가 1차 2명이고, 추가 13명 이른다. 그 대표적인 몇 분을 소개 하고자 한다.
▲금천(錦川 ) 노임수(盧林壽, 1977ㅡ1911)
곡성 오곡면 덕산리에서 출생하여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원중, 조규하 동지들과 석곡면과 순천 삼산 전투에서 일본과 교전하고 1907년에는 감동신 의병장과 함께 지리산 덕유산 내장산 일대에서 활약하며, 고광순 의병과 힘을 합하여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부터는 독자 활동하면서 같은해 4월 16일 신정우진 의병 20명과 합하여 1908년 11월 8일 죽곡면 동계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직했다.
★건국훈장 국민장 수상
▲남강(南崗) 신정백(申正栢, 1877ㅡ1912)
죽곡면 남양리 출생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함. 죽곡면 남양리와 태평리에 공적비가 있다.
★국민훈장 독립장 수상
▲윤정구(尹正九, 1882ㅡ1946)
곡성읍 출신으로 의병부장(副長)으로 순창 남원 곡성 구례 등 섬진강 유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을 썼다. 묘지 도림사입구.
★ 국민훈장 애국장 수상
▲성암 조우식(趙遇植, 1869ㅡ1937)
오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선생과 의병 활동을 곡성 정읍 남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면암선생이 일본 대마도에 붙잡혀 갈 때 같이 수행하고 면암선생을 보좌 하다가 면암이 순직하니 같이 시신을 모시고 귀국하였으며 고향 마을에 오강사(梧岡祠)를 조영선(趙泳善, (1879ㅡ1932)씨와 함께 지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신위를 모시니 일본경찰서장이 강제훼철하니 이에 항의 뜻으로 사당 앞의 은행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곡성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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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애국장 수상.
♦유신반대 民族詩人 조태일(趙泰一)
조태일 시인은 우리고장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에서 대처승 조봉호씨와 신경임 여사 사이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광주 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저항 시인이다. 경희대 2학년 재학 당시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詩)<아침선박>이 당선 문단에 등단, 육군 중위로 제대 후 진정순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 하고, 월간 시전문지 <詩人>을 창간 운영하다가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했다. 제1시집은 <아침선박>1965년 간행 하였으며, 제2시집은 <식칼론>1970년 간행하여 유신반대 저항시인의 대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태일의 문학의 생명은 강건함에 있다. 야망과 위선을 직설화법으로 질타하는 그 통렬함에 있다. 총칼에 짓밟힌 민주, 군화 발에 유린된 인권의 현주소를 고발한다. 군사정권의 폭력을 좌시 하지 않겠다는 우렁찬 목소리다.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일어선다. 좌절의 상처가 깊을수록 그의 pen은 더욱 날카로웠다. 탄압은 식칼을 더욱 날카롭게 버리고 결국 유신의 심장을 겨눴다<48편의 연작시>
제3시집 <國土>는 긴급조치 9호로 판매 금지 당함
1978년 일본 이화서방(梨花書房)에서 <國土>일역 출간
1977년 양성우 시인의 시집<겨울공화국>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로 高銀 詩人과 함께 투옥
1982년 항일민족시선집<아아 내나라> 시인사에서 출간
1983 제4시집<가거도>. 제5시집<자유와 시인더러>1987년. 제6시집<산속에서 꽃 속에서)1991년(청운 문학상 수상). 제7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제10회 만해문학상 수상)
산문집 <詩人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 1996년간. 이론서<시 창작을 위한 詩論>1994년간, <알기 쉬운 시창작 강의>1998년간, 김 현 승 詩 정신 연구. 제8 詩集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년
1994년 광주대학교 예술대 초대학장으로 취임
1999년 간암으로 별세
▲1999년 보관문화훈장 추서
조태일 기념관 및 시집 박물관(곡성군에서 운영․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799 山18ㅡ24 ).
규모: 부지면적: 5.859 평방미터(1.772평), 건축면적: 419.49 평방미터.
곡성일보 admin@gs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