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오랜만에 호사를 가득 누렸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늘 함께 하는 듯한 그리운 친구들, 이 아름다운 계절을 느껴 보고픈 마음들로 모였다.

지리산 화엄사 아래 식당가에서 향기로운 나물이 가득한 산채정식으로 시작한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듯 날씨도 선선하고 하늘엔 부드러운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식사 후 한적한 화엄사 길로 접어들었다. 길옆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함께 주변에 가을이 가득하다.

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나무들을 찬찬히 살피며 도란도란 걷는 이 시간이 바로 힐링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다. 그동안 쌓인 삶의 피로가 사라지며 씻은 듯 머리가 맑아진다.

어린 시절 연보라색 들국화로만 알았던 쑥부쟁이꽃들이 만발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이름 모를 앙증맞은 노란 들꽃이 색다르다.

처음엔 작은 국화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씀바귀꽃 같기도 하고 언니는 고들빼기꽃이라고도 한다. 한참을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며 주장을 펴다 얼굴을 마주 보며 함박웃음을 웃는다.

이 아름다운 날, 이 좋은 순간에 예쁜 노란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 되지 이름이 무엇이든 그게 뭐 대수랴.

화엄사 앞 돌다리를 건너 고즈녁한 찻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짙게 우려낸 따끈한 쌍화차가 처음엔 쓴듯하더니 마실수록 입안에 감긴다. 마치 우리 사이 같다.

이렇듯 한 번씩 마음 맞추며 만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각자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다 가끔 얼굴 보고, 맛난 것 먹고, 수다나 실컷 떨자고 가볍게 시작한 만남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우려낸 쌍화차처럼 향기롭고 진한 사이가 되었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늘 감사한 덕분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각자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끝이 없다. 맘에 드는 좋은 공연이라도 함께 보는 날은 각자의 느낌을 나누느라 그 이야기가 더 깊고 넓어진다.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얘기를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는
마음이 넉넉한 언니, 연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준비하고 오늘은 맛난 단감도 준비해 온 한없이 너그럽고 어여쁜 동생, 먼 길도 즐겁게 달려가 그동안 쌓인 수다를 폭포수처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나, 서로 마주 보며 맘껏 터뜨리는 웃음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만나는 이 시간들에 무한 감사하며 마냥 행복해 한다.

맑고 소소한 가을의 어느 멋진 날에 화려하지도 길지도 않은 소박하고 짧은 만남에서, 마음에 사랑을 가득 담고 깊어가는 가을의 호사를 맘껏 누린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였다.